서울대 입학식날 가족사진을 보며..
I.
낡은 사진 한 장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1974년 3월, 서울 동숭동 교정이었다. 교복 차림의 젊은이가 가족들 틈에 서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새 학과의 배지가 빛났고, 목에는 은메달이 걸려 있었다. 자연계열 수석 입학. 그날의 영광이 사진 한 장에 정지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형, 이모와 큰어머니, 그리고 덕규 형까지. 다섯 명의 친척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기대가 비쳤다. 젊은 수찬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베레모 아래 얼굴은 미래를 알지 못했다. 메달은 지금도 집안 어딘가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터였다.
II.
원래는 문과생이었다. 고교 3년 내내 법관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시대는 순탄하지 않았다.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라는 시대의 폭풍이 그를 덮쳤다. 전주고등학교 교정에서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날, 그는 제적당했다. 대학 입학은 한 해 미뤄졌다. 재수학원에서 문과와 이과 사이를 오갔다. 그는 철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학 선생님인 아버지에게 철학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의 학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수학과를 택했다. 법학도의 길은 그렇게 닫혔고, 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일로 해서, 어, 인생의 경로가 바뀌게 된 거죠."
III.
대학에 들어와서도 잠잠히 있지 않았다. 고교 시절의 제적 경험 탓에 감시가 따랐지만, 그는 지하 서클 활동 대신 공개적인 길을 택했다. 자연과학대학 편집실의 편집장이 되었다. 유신 치하의 엄혹한 검열 속에서도 '과학 세대'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했다. 그곳에서 다른 단과대학 편집장들과 교류하며 시대의 목소리를 담으려 애썼다. 동기들 중 감옥에 간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편집실의 문턱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수학은 그가 원했던 철학의 길이 아니었으나, 훗날 경제학, 정치학, 그리고 다시 철학의 길을 걸으며 단단한 논리적 토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말한다.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철학에 지금 많이 시간을 쏟고 있는데."
IV.
당시 서울대학교의 등록금은 한 학기에 5만 원이었다. 수석 입학자에게는 그 등록금만큼의 장학금이 주어졌다. 종로학원에서도 재수생 수석에게 같은 금액의 장학금을 내어주었다. 사립대학의 학비가 몇 배나 비쌌던 시절, 서울대는 가난한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돈이 많은 부유층보다는 전국 각지의 명문고 출신, 그리고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악착같이 공부하여 모이던 곳이었다. 지금처럼 돈이 있어야 좋은 학교를 간다는 생각은 그때는 없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교정에 뿌려진 햇살 아래, 메달을 목에 건 젊은이는 미래의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시절, 그의 손에는 5만 원짜리 등록금 영수증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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